
-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 태어난 사연
철도와 곡성의 인연은 길고도 깊다. 이리에서 여수로 연결되는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1914년 철도가 곡성 땅을 지나게 된다. 괴물처럼 달리는 시커먼 철마를 접한 산간오지 곡성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곡성역이 개통하게 된 것은 그때로부터 19년이 지난 1933년 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인구 대비로 볼 때, 곡성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도 드물 것이다. 내 노라 하는 사업가. 학자. 법률가. 군인. 정치인. 체육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 대부분은 청운의 꿈을 품고 곡성역에서 서울을 향한 기차를 탓 던 사람들이다. 이렇듯 외부로 열린 창 역할을 해왔던 곡성역인데 1999년 전라선 똑 바로 펴고하나의 단선이었던 철도를 왕복할 수 있는 복선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역사와 곡성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곡성역이 철도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불가피하게 현재 곡성역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 기차마을 정문으로 변모한 구 곡성역 그대로 놔두면, 결국 어디론가 매각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옛 곡성역, 곡성 사람들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할 수 가 없었다. 어찌 우리들의 영욕과 추억의 상징인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곡성군은 이러한 군민들의 염원을 받들어 곡성역과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 철로를 매입했다. 그곳에 증기기관차를 달리게 한다면 곡성역도 보존하고, 관광객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발한 즉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발로 움직이는 기차 측 레일 바이크를 투입하기로 했다. 특히 레일바이크 운영 계획은 곡성이 국내에서 가장 먼저 세우고, 레일바이크라는 작명까지 했으나아쉽게도 전국 최초라는 기록은 다른 지역이 가져갔다. ▲ 곡성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구 곡성역 플렛폼 증기기관차와 레일 바이크는 기대 했던 이상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옛 곡성역은 전라선 기차가 통과하던 시절 보다 더 유명하게 되어 구 곡성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토지’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테마파크인 곡성섬진강기차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 기차마을과 가정역을 오가는 섬진강 증기기관차
2019-09-19 - 함허정에 새겨진 의로운 뜻
함허정과 군지촌정사가 자리한 군촌 마을은 동악산을 등지고 섬진강과 마주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진산인 동악산은 소가 강가에 누워 한가로이 되새김질하는 와우 형국이며, 함허정은 목동이 강가에서 피리를 부는 형국으로 먹고살기 좋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이상향을 상징한다. 함허정 뒤편 동산은 위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거북을 닮았다. ▲ 함허정 설경 동산과 섬진강이 접하는 부분은 낭떠러지로서 하단에는 거북바위와 용암이 있어 해중신선경(海中神仙景)으로 불리운다. 심광형 선생은 그런 풍수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조선시대 호남 4대 정자로 일컬어질정도로 함허정은 섬진강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굽이치는 섬진강, 새하얀 백사장과 더불어 들녘 건너편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설산과 멀리 무등산까지 바라다 보였다. 이런 풍경에 이끌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 함허정은 작지만 짜임새 있게 지어진 누정이다. 심광형 선생이 함허정을 세운 것은 풍류나 음풍농월을 즐기기 위함 보다 훨씬 더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 같다. 호연정( 함허정의 원래 이름)은 군지촌정사에 학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을 무렵에 지어졌다.군지촌 정사는 일종의 기숙학교인셈인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는 지척에 있는 함허정과 술과 노래가 있는 누정의 유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함허정 역시 학당의 부속건물로서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심광형 선생은 이곳의 풍수를 헤아리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저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거북처럼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마음을 담아 함허정을 세웠을 것이다. 후손들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무려 400년동안 지극정성을 다해 함허정을 보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심광형 선생은 병조참판을 지낸 심안지 선생의 손자로서 대단한 부와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물려봤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오직 학문에 전념하며후진양성에 힘쓴 존경받는 선비로 알려지고 있다. ▲ 400년 세월 ,섬진강은 변했어도 함허정은 변하지 않았다.
2019-09-20 - 섬진강 뱃노래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옥녀봉아래 데미샘에서 시작하여 임실과 순창을 거쳐 곡성군 입면 합강리에서 옥과천과 합류하면서 비로소 강으로서의 의젓한 면모를 보여준다. 곡성으로 들어온 섬진강은 동악산과 고리봉 협곡을 지나, 고달평원을 적신 다음 17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면서 36km를 달린 다음 압록에서 대황강과 만나여 몸집을 불려 죽곡면 하안리에서 구례 땅에 몸을 내어준다. 조선시대에는 섬진강 곡성구간만을 별도로 떼어 순자강이라 불렀다. ▲ 남원 고리봉과 동악산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 ▲ 곡성구간을 흐르는 섬진강을 순자강이라 불렀다. 남원에서 흘러 들어든 요천과 합류하는 장선리 인근 드넓은 갈대밭이 메추라기 서식지라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가 곡성과 지리산 동쪽 자락 마을들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90년대까지 운행하던 호곡나루터가 사라지면서 섬진강 나루터와 주막에 얽힌 구수한 사연들은 이제 그 시절을 살아온 어르신들 입에나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 섬진강 강태공 영화 ‘곡성’ 촬영지 섬진강변 동산리 낚시터 영화 ‘곡성’에는 공포영화 답지 않게 아름다운 섬진강 풍경이 가끔 등장하여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시작 장면의 아련한 강변 풍경은 곡성읍 동산리 구간으로 섬진강과 남원에서 흘러온 요천의 합수부가 드넓은 습지를 펼쳐놓고 있는 곳이다. 이 평화로운 장면은 일본 배우 쿠니무라준이 바위에 앉아서 낚시를 하는 장면으로 연결 되면서 앞으로 전개될 심상치 않은 사건들을 예고한다. ▲ 영화 '곡성' 촬영장소 동산리 낚시터 영화에서 평화로움과 불길함이 공존하면서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동산리 낚시터는 원래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던 곳으로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와 더위도 식히고 모래찜질을 즐기던 유원지였다. 이토록 아름답던 경관은 섬진강의 수량이 줄면서 모래사장은 갈대 무성한 습지로 바뀌었고 관광객 대신 무수한 철새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이곳의 풍경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 횡탄정에서 바라본 섬진강 동산리 언덕에는 동산정이 강 건너편에는 횡탄정이 서로를 바라보는 형상으로 서 있어 예로부터 풍류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양쪽을 오고 갔던 횡탄 나루터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여기 저기 솟아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2019-09-27 - 남도의 정한이 흐르는 대황강
반구정 갈대숲과 죽곡 대숲을 지나온 대황강 강바람에는만남의 정과 이별의 한이 실려 있는 듯그 바람의 노래 가락에 맞춰 절로 흥얼거려 지는 한국의 강 그 옛 자취가 남아 있는 대황강 이야기 속으로.... ▲ 대황강의 봄 남농 허백련선생의 계보를 이은 수묵산수화의 대가인 아산 조방원 선생의 고향은 전남 무안이다. 그가 말년을 보낸 거처는 곡성군 죽곡면 연화리다. 선생께서 이곳을 선택한 것은 죽곡을 흐르는 대황강이 그의 작품세계에 구현된 수묵 산수화의 배경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보성 일원산에서 발원하여 남도 300리를 적시며 섬진강을 향해서 흘러온 대황강은 굽이마다 널찍한 백사장을 풀어놓았다. 곡성에 가까워질 수 록 강폭은 넓어지고 울창한 대숲이 끝없이 펼쳐져있어 잔바람에도 서걱 이며 강을 노래하던 풍류가 넘치는 강이었다. ▲ 대황강의 봄 그런가 하면 대황강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지천으로 널린 대황강 물고기는 산이 많고 농지가 협소한 강변사람들에게 요긴한 생계수단이 되어 주었다. 70~80년대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줄을 잡아당겨 건너는 나룻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래서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곳곳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이렇듯 대황강은 풍성했으며 평화로웠다. 이 강줄기를 타고 남도 300리 정한이 흘렀다. ▲ 대황강의 가을 보성강을 대황강으로 부르게 된 사연 보성강은 보성 일림산에서 발원하여 호남정맥 북쪽 골을 따라 동북쪽으로 120km를 달려 곡성 석곡, 목사동, 죽곡을 거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보성강을 예로부터 곡성에서는 대황강이라 불렀다. 섬진강을 순자강으로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에 물고기가 많아 밤이면 농사일을 마친 강변사람들이 횃불을 밝히면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부터는 곡성군 차원에서는 대황강을 공식명칭으로 삼고 있다. 1991년 곡성 석곡과 인접한 주암면에 댐이 막히면서 대황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의 물길도 끊기게 된다. ▲ 섬진강과 만나는 대황강 강이 호수로 바뀌면서 이 물은 식수, 공업용수, 농업용수로 전라남도 전역에 공급된다. 그 바람에 겨우 명맥을 유지한 대황강으로 흘러드는 수량은 댐이 막히기 전에 비해서 80% 가까이 줄었다. 그러니 더 이상 보성강이라 부르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아직도 보성강이다. 주암댐의 수문을 활짝 열어 예전처럼 강물을 흘려보내지 않는 이상 지금 곡성의 명칭대로 ‘대황강’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맞다. ▲ 대황강 상류
2019-09-27
-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 태어난 사연
철도와 곡성의 인연은 길고도 깊다. 이리에서 여수로 연결되는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1914년 철도가 곡성 땅을 지나게 된다. 괴물처럼 달리는 시커먼 철마를 접한 산간오지 곡성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곡성역이 개통하게 된 것은 그때로부터 19년이 지난 1933년 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인구 대비로 볼 때, 곡성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도 드물 것이다. 내 노라 하는 사업가. 학자. 법률가. 군인. 정치인. 체육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 대부분은 청운의 꿈을 품고 곡성역에서 서울을 향한 기차를 탓 던 사람들이다. 이렇듯 외부로 열린 창 역할을 해왔던 곡성역인데 1999년 전라선 똑 바로 펴고하나의 단선이었던 철도를 왕복할 수 있는 복선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역사와 곡성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곡성역이 철도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불가피하게 현재 곡성역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 기차마을 정문으로 변모한 구 곡성역 그대로 놔두면, 결국 어디론가 매각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한 옛 곡성역, 곡성 사람들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할 수 가 없었다. 어찌 우리들의 영욕과 추억의 상징인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곡성군은 이러한 군민들의 염원을 받들어 곡성역과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 철로를 매입했다. 그곳에 증기기관차를 달리게 한다면 곡성역도 보존하고, 관광객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발한 즉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발로 움직이는 기차 측 레일 바이크를 투입하기로 했다. 특히 레일바이크 운영 계획은 곡성이 국내에서 가장 먼저 세우고, 레일바이크라는 작명까지 했으나아쉽게도 전국 최초라는 기록은 다른 지역이 가져갔다. ▲ 곡성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구 곡성역 플렛폼 증기기관차와 레일 바이크는 기대 했던 이상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옛 곡성역은 전라선 기차가 통과하던 시절 보다 더 유명하게 되어 구 곡성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토지’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테마파크인 곡성섬진강기차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 기차마을과 가정역을 오가는 섬진강 증기기관차
2019-09-19 - 함허정에 새겨진 의로운 뜻
함허정과 군지촌정사가 자리한 군촌 마을은 동악산을 등지고 섬진강과 마주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진산인 동악산은 소가 강가에 누워 한가로이 되새김질하는 와우 형국이며, 함허정은 목동이 강가에서 피리를 부는 형국으로 먹고살기 좋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이상향을 상징한다. 함허정 뒤편 동산은 위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거북을 닮았다. ▲ 함허정 설경 동산과 섬진강이 접하는 부분은 낭떠러지로서 하단에는 거북바위와 용암이 있어 해중신선경(海中神仙景)으로 불리운다. 심광형 선생은 그런 풍수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조선시대 호남 4대 정자로 일컬어질정도로 함허정은 섬진강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굽이치는 섬진강, 새하얀 백사장과 더불어 들녘 건너편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설산과 멀리 무등산까지 바라다 보였다. 이런 풍경에 이끌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 함허정은 작지만 짜임새 있게 지어진 누정이다. 심광형 선생이 함허정을 세운 것은 풍류나 음풍농월을 즐기기 위함 보다 훨씬 더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 같다. 호연정( 함허정의 원래 이름)은 군지촌정사에 학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을 무렵에 지어졌다.군지촌 정사는 일종의 기숙학교인셈인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는 지척에 있는 함허정과 술과 노래가 있는 누정의 유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함허정 역시 학당의 부속건물로서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심광형 선생은 이곳의 풍수를 헤아리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저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거북처럼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마음을 담아 함허정을 세웠을 것이다. 후손들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무려 400년동안 지극정성을 다해 함허정을 보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심광형 선생은 병조참판을 지낸 심안지 선생의 손자로서 대단한 부와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물려봤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오직 학문에 전념하며후진양성에 힘쓴 존경받는 선비로 알려지고 있다. ▲ 400년 세월 ,섬진강은 변했어도 함허정은 변하지 않았다.
2019-09-20 - 섬진강 뱃노래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옥녀봉아래 데미샘에서 시작하여 임실과 순창을 거쳐 곡성군 입면 합강리에서 옥과천과 합류하면서 비로소 강으로서의 의젓한 면모를 보여준다. 곡성으로 들어온 섬진강은 동악산과 고리봉 협곡을 지나, 고달평원을 적신 다음 17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면서 36km를 달린 다음 압록에서 대황강과 만나여 몸집을 불려 죽곡면 하안리에서 구례 땅에 몸을 내어준다. 조선시대에는 섬진강 곡성구간만을 별도로 떼어 순자강이라 불렀다. ▲ 남원 고리봉과 동악산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 ▲ 곡성구간을 흐르는 섬진강을 순자강이라 불렀다. 남원에서 흘러 들어든 요천과 합류하는 장선리 인근 드넓은 갈대밭이 메추라기 서식지라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가 곡성과 지리산 동쪽 자락 마을들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90년대까지 운행하던 호곡나루터가 사라지면서 섬진강 나루터와 주막에 얽힌 구수한 사연들은 이제 그 시절을 살아온 어르신들 입에나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 섬진강 강태공 영화 ‘곡성’ 촬영지 섬진강변 동산리 낚시터 영화 ‘곡성’에는 공포영화 답지 않게 아름다운 섬진강 풍경이 가끔 등장하여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시작 장면의 아련한 강변 풍경은 곡성읍 동산리 구간으로 섬진강과 남원에서 흘러온 요천의 합수부가 드넓은 습지를 펼쳐놓고 있는 곳이다. 이 평화로운 장면은 일본 배우 쿠니무라준이 바위에 앉아서 낚시를 하는 장면으로 연결 되면서 앞으로 전개될 심상치 않은 사건들을 예고한다. ▲ 영화 '곡성' 촬영장소 동산리 낚시터 영화에서 평화로움과 불길함이 공존하면서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동산리 낚시터는 원래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던 곳으로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와 더위도 식히고 모래찜질을 즐기던 유원지였다. 이토록 아름답던 경관은 섬진강의 수량이 줄면서 모래사장은 갈대 무성한 습지로 바뀌었고 관광객 대신 무수한 철새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이곳의 풍경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 횡탄정에서 바라본 섬진강 동산리 언덕에는 동산정이 강 건너편에는 횡탄정이 서로를 바라보는 형상으로 서 있어 예로부터 풍류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양쪽을 오고 갔던 횡탄 나루터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여기 저기 솟아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2019-09-27 - 남도의 정한이 흐르는 대황강
반구정 갈대숲과 죽곡 대숲을 지나온 대황강 강바람에는만남의 정과 이별의 한이 실려 있는 듯그 바람의 노래 가락에 맞춰 절로 흥얼거려 지는 한국의 강 그 옛 자취가 남아 있는 대황강 이야기 속으로.... ▲ 대황강의 봄 남농 허백련선생의 계보를 이은 수묵산수화의 대가인 아산 조방원 선생의 고향은 전남 무안이다. 그가 말년을 보낸 거처는 곡성군 죽곡면 연화리다. 선생께서 이곳을 선택한 것은 죽곡을 흐르는 대황강이 그의 작품세계에 구현된 수묵 산수화의 배경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보성 일원산에서 발원하여 남도 300리를 적시며 섬진강을 향해서 흘러온 대황강은 굽이마다 널찍한 백사장을 풀어놓았다. 곡성에 가까워질 수 록 강폭은 넓어지고 울창한 대숲이 끝없이 펼쳐져있어 잔바람에도 서걱 이며 강을 노래하던 풍류가 넘치는 강이었다. ▲ 대황강의 봄 그런가 하면 대황강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지천으로 널린 대황강 물고기는 산이 많고 농지가 협소한 강변사람들에게 요긴한 생계수단이 되어 주었다. 70~80년대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줄을 잡아당겨 건너는 나룻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래서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곳곳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이렇듯 대황강은 풍성했으며 평화로웠다. 이 강줄기를 타고 남도 300리 정한이 흘렀다. ▲ 대황강의 가을 보성강을 대황강으로 부르게 된 사연 보성강은 보성 일림산에서 발원하여 호남정맥 북쪽 골을 따라 동북쪽으로 120km를 달려 곡성 석곡, 목사동, 죽곡을 거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보성강을 예로부터 곡성에서는 대황강이라 불렀다. 섬진강을 순자강으로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에 물고기가 많아 밤이면 농사일을 마친 강변사람들이 횃불을 밝히면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부터는 곡성군 차원에서는 대황강을 공식명칭으로 삼고 있다. 1991년 곡성 석곡과 인접한 주암면에 댐이 막히면서 대황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의 물길도 끊기게 된다. ▲ 섬진강과 만나는 대황강 강이 호수로 바뀌면서 이 물은 식수, 공업용수, 농업용수로 전라남도 전역에 공급된다. 그 바람에 겨우 명맥을 유지한 대황강으로 흘러드는 수량은 댐이 막히기 전에 비해서 80% 가까이 줄었다. 그러니 더 이상 보성강이라 부르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아직도 보성강이다. 주암댐의 수문을 활짝 열어 예전처럼 강물을 흘려보내지 않는 이상 지금 곡성의 명칭대로 ‘대황강’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맞다. ▲ 대황강 상류
2019-09-27